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정원(政院), 후원(喉院), 은대(銀臺), 대언사(代言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7월에 반포된 관제에 의하면 원래 왕명출납의 일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중추원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는데, 이 때 그 속아문으로 승지방을 설치하였다. 승지방은 왕명 출납의 실무를 맡았고, 그 장관으로 도승지를 두어 정3품으로 하였다. 물론, 이 때의 관제에 의하면 중추원은 왕명 출납 이외에 군기(軍機)도 관장하는 강력한 기구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자, 먼저 사병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정종 2년(1400) 4월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 분할하였다. 군기의 사무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이관하고, 왕명 출납을 위하여 승지방을 승정원으로 독립시켰으며, 태종 원년(1401) 의흥삼군부가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의 기능도 여기에 귀속되었고, 그 명칭도 대언사(代言司)로 바뀌었다.
태종 5년(1405)에 육조강화책의 하나로 승추부가 병조에 흡수되면서 대언사는 승정원으로 다시 개편되어 독립된 기구로 부활하였다. 그 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이후 승선원(承宣院)으로 개칭될 때까지 같은 이름으로 존속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각 1인씩 모두 6인의 승지가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이었다. 이러한 기본 직제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세종 때 그 골격이 확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때 이루어진 속대전에서는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정7품) 1인을 더 두었고, 서리는 25인이었다.
승정원의 핵심적인 구성 인원인 6승지는 동벽(東壁) 및 서벽(西壁)으로 나누었는데, 도승지와 좌승지ㆍ우승지는 동벽, 좌ㆍ우 부승지와 동부승지는 서벽이라 하였다.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지만, 종2품으로서 승지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승지들은 자기 고유 업무 외에도 타관(他官)을 겸직하는 예가 많았다. 즉, 승지는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ㆍ춘추관수찬관 (春秋館修撰官)을 겸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도승지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여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하였으며, 승지 가운데에서 내의원(內醫院)ㆍ상의원(尙衣院)ㆍ사옹원(司饔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게 하기도 하였다. 또 형방승지(刑房承旨)는 전옥서제조(典獄署提調)를 겸하였다. 대개 6승지를 분방(分房)하여 도승지는 이방,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방, 좌부승지는 병방, 우부승지는 형방, 동부승지는 공방을 맡게 하여 이들의 업무를 분할했으나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왕명에 의해 각 승지의 담당 업무는 융통성 있게 변경될 수 있었다. 6방에서는 6전체제에 따른 여러 관사의 일을 살폈다. 다만 6승지가 기타 관련된 관사와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어디까지 이러한 행정 실무에 관여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때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승정원 승지들의 영향력에 많은 변동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의 기능에 대하여 당시에 만들어진 법전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다”고 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의 강약에 따라 그 영향력의 범위도 크게 달랐으리라고 여겨진다. 사실 승정원이 독립된 기관으로 설립된 것도 태종의 왕권 강화시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태종에 의해 만들어진 승정원이 당시의 정치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는 세종 때도 승정원의 정치적 비중이 매우 컸다는 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말기에 이르러서는 승지들의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대간을 중심으로 한 다른 관료들 사이에서 격화되자 세종도 승지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승정원의 정치적 기능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조 13년(1467)에 당시 세조의 중신들이었던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ㆍ구치관(具致寬) 등으로 하여금 항상 승정원에 나와 정무를 보게 하였는데, 이들을 당시에는 원상(院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조 때 변칙적으로 운영되었던 원상제는 세조의 집권과 즉위에 힘을 도왔던 훈구대신들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키는 폐단을 낳았으므로, 세조의 사후 이에 대한 비판이 크게 제기된 성종 7년(1476)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승정원은 원래의 기능을 회복해 조선 후기까지 국정운영에 중요한 관서로 기능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 인조 원년(1623) 3월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8월까지의 기록이 3,243책의 필사본으로 남아있으며, 판형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41.2cm * 29.4cm 이다. 국보 제303호로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다.
승정원 일기 목록
명칭 |
시기 |
책수 |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
1623년(인조 1) ~ 1894년(고종 31) 7월 |
3,045 |
승선원일기 承宣院日記 |
1894년(고종 31) 7월 ~ 10월 |
4 |
궁내부일기 宮內府日記 |
1894년(고종 31) 11월 ~ 1895년(고종 32) 3월 |
5 |
비서감일기 秘書監日記 |
1895년 4월 ~ 10월 / 1905년 3월 ~ 1907년 10월 |
41 |
비서원일기 秘書院日記 |
1895년 11월 ~ 1905년 2월 |
115 |
규장각일기 奎章閣日記 |
1907년 11월 ~ 1910년 8월 |
33 |
승정원일기와 비슷한 자료는 고려시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성종대(981∼997)에는 은대남북원(銀臺南北院)을 두었고, 현종대(1009∼1031)에는 중추원에 정3품의 승선(承宣) 4인과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인을 두어 왕명을 출납하고 그 출납한 공사(公事)를 기록하게 하였다. 이후 부서와 관명의 변화 속에서도 왕명 출납의 업무는 계속되었고, 그에 대한 기록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 전기에도 승정원일기는 지속적으로 작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일기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선조 이전의 일기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불타고 말았으며, 임진왜란 이후 인조 원년 (1623)까지 기록된 일기도 이괄(李适)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가 다시 임진왜란 이후의 일기를 개수하였으나 영조 20년(1744) 승정원의 화재로 다시 한 번 불에 타고 말았다.
현존하는 승정원일기에도 후일에 개수한 것이 많다. 영조 20년의 화재 당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경종 원년(1721)까지의 일기가 소실되면서 영조 22년(1746) 일기청이 설치되어 승정원일기의 개수작업에 착수하였다. 일기청은 개수를 위해 조보(朝報)를 비롯해 각 사(司)의 일기ㆍ등록 등 기본 사료와 관인의 일기문집 등을 널리 이용해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말에 548책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이것은 본래 소실된 책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고종 25년(1888)에도 또다시 승정원의 화재로 철종 2년(1851)에서 고종 25년(1888)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890년 개수하였다. 이 두 차례의 화재 이외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약간의 분실 또는 소실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개수하였다.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 이하 정3품의 승지 6인과 정7품의 주서(注書) 2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일기는 주서가 맡아 작성했다. 주서는 매일 국왕이 정사를 보는 앞에서 사관(史官)과 함께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을 기록 하여 메모한 초책(草冊;속기록)을 하루치씩 하번주서(下番注書)에게 정서하게 하고, 상소(上疏)나 서계(書啓)와 같은 문자로 된 문건은 서리에게 베끼게 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그날의 일기가 만들어지고 한달 또는 반달 치씩 묶어 표지에 연월일을 적어 승지에게 제출하여 승정원에 보관하게 했다. 분량이 많을 경우에는 두 책으로 나누었으며 윤달의 일기는 따로 성책하였다.
주서는 2인이었는데 필요에 따라 임시로 가주서(假注書) 1인을 더 둘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 관련 기사를 전담해 기록하기 위해 사변가주서 1인을 더 두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상설화되었다. 그런데 주서 자리는 공석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승정원일기는 가주서와 사변가주서가 상ㆍ하번으로 나누어 입시해 작성했다. 물론 주서 한 사람으로 모든 기록을 받아쓰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사관 두 사람이 함께 입시하여 사초(史草)를 작성하므로 1인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원래 모든 공사(公事)는 관료들이 국왕 앞에 직접 나아가 아뢰게 되어 있었으나 뒤에는 아뢸 말을 승지에게 전하면 주서가 글로 써서 아뢰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종 계사(啓辭)는 “어느 승지가 어느 관원의 말로서 임금에게 아뢴다”고 되어 있다. 이를 초기(草記) 또는 초책(草冊)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원본은 초서(草書)로 되어있어 해독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았지만 1960년부터 1977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해서(楷書)로 고치고, 구두점을 찍어 141책으로 간행•보급함으로써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승정원일기는 국정 전반에 걸친 매일매일의 일기를 날짜 순으로 망라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자세한 기초사료이며, 일차사료이다. 따라서 당시에도 정책에 참고할 알아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일기를 꺼내어 그 전의 사례를 찾아보았다. 기본적인 정책 수립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국정에 관한 기본자료로서 조선왕조실록이 있으나 이 여러 기록들을 선별하여 편찬된 자료이고, 그나마 인조 이후에는 부실하여 승정원일기가 없다면 그 시대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종 이후에는 승정원일기가 우리 근대사 분야의 공식기록이었으므로 자료적 가치는 더욱 높다.
게다가 매일 기록되는 날씨는 조선시대 자연현상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국왕의 진료기록 등은 의학사(醫學史)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법제, 사회, 자연 현상, 인사, 국왕과 관료의 동정, 국정 논의 등 광범위한 기록이 들어있어 가히 한국학 연구의 보고라 할 수 있다.